예전에 살던 동네에는 하루 종일 줄에 묶여 사는 개 두 마리가 있었다. 그 애들이 이름도 없이 거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두목이 친구인 나르의 보호자였다. 산책 길에 나르 보호자와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그 개들의 처지에 분개하고 그들을 전혀 보호하지 않는 보호자를 저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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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동거인은 그 개들을 피버와 쿠크라고 불렀다. 피넛버터 색깔과 쿠키앤크림 색깔의 두 마리 개는 우리가 간식을 챙겨주려고 다가가면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들었다. 강아지가 저렇게 밝게 웃을 수도 있다는 걸 두목이보다 피버를 통해서 알았고, 쿠크는 기뻐서 오줌을 지릴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애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은 딱 그만큼이었다, 어쩌다 한번 찾아오는 반가운 사람들이 간식을 주고, 때가 타서 진득해진 털을 쓰다듬어 주고 쇠사슬이 걸린 목을 주물러 주는 것. 우리는 그 개들의 해방을 도울 수 없었다. 마당에 묶여 사는 개 집 위에 그늘막이 있으면 어떻게 방치되든 간에 학대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집을 나서서 피버와 쿠크가 있는 방향으로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멀리서도 걔네가 내 냄새를 맡고 나를 기다릴까봐 조마조마했다.

여름에 나르 보호자에게 연락이 왔었다. 요즘도 그 애들을 가끔 보러 가냐기에 나는 그 사이 이사를 왔다고 했고 피버버와 쿠크의 안부를 물었다. 나르 보호자는 폭염이 이어져서 그 애들을 생각할 때마다 처참하다고,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지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서 연락했다고 했다. 자기 말고 그들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걸 위안으로 삼고 싶다고도 했다. 나에게도 그 연락은 위안이었다, 그리고 더이상 피버와 쿠크 처지의 강아지를 보지 않아도 되는 이 동네에 사는 것에 잠깐 안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피버와 쿠크는 계속 거기에 묶여 살고 있다. 내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내가 걱정하든 잊어버리든, 하루종일 그늘막 아래 묶여있었다.

피버와 쿠크에게 간식을 주러 갈 때, 우리 말고 그들을 도우러 온 사람들을 본적도 있다. 어떤 중년 여자 분은 묶여 사는 개들을 돌보기 위해 주말에 용산구에서 송추까지 차를 몰고 온다고 했다. 쿠크와 피버는 그가 돌아가는 길에 들르는 마지막 코스인 것 같았다. 어떤 날은 백팩에 강아지를 위한 짐을 챙겨서 방문한 여자 청년 두 명도 봤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그들도 쿠크와 피버에게 소중한 이웃이었다.

“자기가 먹고 남은 음식을 프라이팬 채로 두고 가는 사람에게도 주인이라고 꼬리 흔들며 반겨 주는데 어쩌면 좋을까요”, “그러게요”, 나르 보호자와의 대화는 계속 맴돌았다. 어젯밤 자기 전에 동거인에게 오랜만에 피버와 쿠크 생각이 났다고 말을 꺼냈다가 우리의 대화도 맴돌았다. 걔네들은 산책을 한 적이 있을까, 최초의 산책에서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리가 만약에 목줄을 몰래 끊어서 걔네가 도망치고 들개가 된다면 그게 더 행복한걸까? 나이도 모르고 20kg 넘는 개가 보호소에 간다면 안락사를 피할 길이 있을까? 영원히 알 수 없었다. 나는 차라리 …보다는 …가 낫다고 생각해, 그런데 그건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예전에도 정확히 똑같은 대화와 침묵이 이어졌었다. 무엇이 더 불행할지 우리는 알 수 없고 쿠크와 피버만이 알 수 있는데 그들은 선택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이 가진 것은 그늘막 뿐이다.

끔찍한 생각만 이어져서 잠이 오지 않을까봐 우리는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지금 사는 집 뒷산의 청솔모들로 이야기를 지어냈다. 최대한 귀엽고 웃기게, 청솔모에 의해 파괴되는 것은 인간 뿐이도록. 그렇지만 이야기에 개를 등장시키지는 않았다. 그러고서 우리는 잘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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