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드라마의 22화 쯤에 와서는 새로운 재미를 발견했다. 알고보니 대단히 순정적인 로맨스가 이 이야기의 거대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조조와 관우와 유비의 삼각관계인데, 나는 이 구도가 거의 프랑스와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맞먹는다고 생각했다.

도원결의 좀 맺었다 뿐이지 별 거 해준 것도 없는 유비에게 관우는 목숨을 바치려 하고, 조조는 그런 관우의 마음을 얻기 위해 조금의 기만도 없이 진심을 다한다. 유비 삼형제가 전쟁에서 패한 후 흩어져서 관우가 잠깐 조조 쪽에 귀순하는 시기가 있다. 관우는 언제든 유비의 소식만 확인되면 조조를 떠나겠다고 미리 선언했는데도, 조조는 그 조건까지도 허용하면서 관우에게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주려고 한다. 조조가 식사 중에 자기가 먹던 사슴고기가 너무 맛있다고, 빨리 관우 집에 가져다 주라고 재촉하는 장면이 있다. "식지 않게 화로에 얹어서 가져다 줘라!" 그 사람이 먹을 음식이 식을까봐 염려하는 마음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 조조가 관우에게 자기 아들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적토마를 하사하는 대목이다. 금은보화에도 시큰둥하던 관우가 눈이 돌아가서 조조에게 감사를 표하더니, “적토마는 하루에 천리를 내달리니 이제 유비 형님을 찾으러 어디든 갈 수 있다”며 기뻐한다. 속으로 생각만 하던가. 관우는 말도 안되게 눈치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일종의 bitching 이었을까. 조조는 대인배이므로 웃으면서 관우를 보내준 후, 상심이 너무 큰 나머지 쓰러지고 만다... 부하 장군들이 열받아서 관우를 죽이려고 하는데 두통으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와중에 관우 건드리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다. 동양 남성에게서 이런 순정을 발견한 적이 없다.

한편 유비는 관우가 조조 밑에 있는 걸 알고서 대단히 수동공격적인 맹비난을 적은 밀서를 보낸다. 실망스럽기 그지없고 이럴거면 형제의 연을 끊는 게 좋겠다고(도원결의는 여러모로 허세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자주 있다) 죄책감을 유발하는 등 가스라이팅을 일삼는다. 하여간 유비만한 소인배가 또 없다. 그러나 관우는 조조가 준 집이며 보물들을 그대로 놓고 유비에게 떠난다. 적토마를 타고. 나는 여기서 잠깐 흥미로운 의문이 생겼는데: 1)아시아 남자들이 가장 선망하는 영웅이 관우라는 점 2)‘먹튀’하는 여자들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과 혐오가 대단하다는 점 사이의 모순이다. 조조가 관우의 마음을 얻으려고 가장 뛰어난 말인 적토마를 하사하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비싼 차를 사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관우는 그 차를 타고 다른 남자에게 가버린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롤스로이스 뽑아줬더니 전남친 한테 가버리네요' 라고 게시판에 올리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 '확 죽여버리세요!'라고 외친 당신... 당신은 방금 관운장을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조조는 자신을 버린 관우를 어떻게 대했는가. 관우가 적토마를 타고 유비에게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는 "유비 그 새끼가 뭐라고..."하며 이를 갈지 않고, 관우의 원 앤 온리인 유비야말로 진정한 영웅이 아니겠냐며 유비를 높이 산다. 조조의 사랑이 동양 역사상 가장 숭고한 사랑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삼국지로 BL을 파는 게 전혀 고약한 취향이 아니었다. 차라리 이 이야기 전체를 로맨스로 읽어내는 것이 훨씬 더 유의미할지도 모른다.

(2020. 1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