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를 드라마로 보기 시작했다. 2010년에 만들어진 95화짜리 드라마가 넷플릭스에 올라와있다. 출중한 시추에이션 코미디로서 즐기는 재미가 큰데 그게 만든 사람들의 의도인지는 확실치않다. 안 그래도 이 드라마에는 만든 사람의 의중을 파악하기 힘든 구석이 너무 많다. 일단은 만든이들이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를 의로운 인물로 보는지 한심한 놈들로 보는지가 언제나 혼란스럽다. 삼국지의 주인공(프로타고니스트)은 유비 삼형제고 제일 인기가 많은 인물은 관우인줄 알았는데 이들 삼형제가 하나같이 다 멋이 없고 허접하기 때문이다. 하여간 보고 있으면 웬만한 스탠드업 코미디 보다 웃음의 빈도가 더 높기 때문에 꾸준히 보고 있다.

스무살 때 어떤 남학우가 "삼국지를 안 읽었다니...도대체 십대 때 뭘 배운거냐?"고 개탄한 적이 있다.

언젠가 더 소상히 밝히고 싶은데 나는 어떤 세계 안에서 미적 요소로서 남성성이 재현되는 방식, 그 방식이 변화해온 과정에 관심이 많다. 이를테면 지금은 ‘여성혐오’라고 불리는 것들이 5년 쯤 전만 해도 ‘마초적’이라고 불렸다. 여성혐오자로 분류되기를 원하는 남자들은 별로 없는데 많은 남자들이 스스로를 마초라고 칭하면서 자랑스러워하던 때가 있었다. 여혐은 악덕이지만 마초이즘은 미덕일 때, 마초의 대명사로 불리는 남성 캐릭터들은 더는 떳떳하게 멋을 부릴 수가 없을 것이다. 가령 필립 말로 시리즈를 읽을 때나 마이클 만의 <히트>, 장 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같은 것을 볼 때 나는 종종 웃음을 참기 힘들다. 마초라는 말이 바다를 건너 오기 전 동양에는 ‘대장부’ '영웅호걸' 같은 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지가 그 영웅호걸들과 대장부들의 클래식이지 않은가?

현재 3분의 1 정도 밖에 보지 못했으나 삼국지를 칭송하는 이들이 이것으로부터 뭘 배웠다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일단 여태까지 내 마음에 든, 현대적인 관점에서 영웅과 군자의 덕목을 갖춘 사람은 조조 뿐이다. 매력적인 악역이라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인물됨이 가장 뛰어나다. 조조가 안타고니스트가 되어야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극중에서 조조가 가진 비열하고 사악한 면들이 부각되는 것은 유비를 위한 기능적 선택이 아닌가 싶다. 유비가 그 정도로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조조를 깎아내려야만 유비가 상대적으로 인의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유비라고 비열하지 않고 의로운가? 그렇지 않고, 조조는 의롭지 않은데 유능하고 유비는 의롭지 못한데다 무능할 뿐이다. 아무튼 둘 중 하나를 군자로 꼽으라면 조조를 고르겠다. 적어도 그에게는 배울 점이 있고, 동탁같은 무뢰배도 아닌데다, 정도를 지키면서 천하를 호령하기 위해 영리한 수를 쓴다. (조조에 대한 나의 애정은 조조 역을 맡은 배우 천졘빈의 능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직 이 사람만이 연기를 수준 이상으로 하고 있다. 다른 인물들은 '내가 다들 아는 그 유비 관우 장비이니 그냥 그런 줄 아쇼' 쯤의 태도로 역할극을 하고 있어서 우스움을 견디며 봐야하는데 조조가 나올 때는 아예 다른 작품이 된다. 천졘빈만이 조조의 대사를 자기 언어로 만들고 호흡과 걸음걸이와 눈을 깜박이는 속도를 조조답게 통제한다.)

삼국지 이야기에서 유비가 선이자 프로타고니스트라고 믿기 위해서는 그 시대(서기 184년-280년) 사람들의 신념을 따라야한다. 그들이 유비를 응원하는 것은 유비가 천자(황제)와 한왕조를 밑도 끝도 없이 숭배하며 황가의 피가 아주 조금 섞여있다는 지극히 전근대적인 이유 때문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황제, 왕, 임금에 대한 충심을 갖는 것이 가능할까? 황가의 사람들에게는 우리와 다른 피가 흐른다고 믿을 수 있을까? 자기가 쓴 밀서가 조조에게 발각되자 부인에게 누명을 씌우고 그가 목이 졸려 살해당하도록 내버려두는 천자를 황제라고 떠받들 이유가 있을까? 그런데 그런 천자를 바지 황제로 앉힌 역적 조조와 달리 유비는 한왕조를 수호할 유일한 인물이기에 프로타고니스트 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조는 더욱 현대적인 관점의 영웅이다. 극 중에서는 모두들 조조를 ‘환관의 자식’이라며 비하하고 하고 역적으로 몬다. 조조는 혈통이 아닌 스스로 습득한 지략과 재능으로 주어진 운명과 시대에 도전하고 천하를 제패한다. 황가의 DNA와 후천적 성취 중 어느 것이 패왕의 자질로 더 적합하겠는가?

앞으로 이 95화 짜리 드라마를 보면서 느끼는 바를 조금씩 적어보려고 한다. 여태까지 가장 크게 얻은 '교훈'은 역시 조조로부터 배운 것이다. 조조가 진짜 영웅인 또다른 이유가 있는데 이 사람은 다른 아둔한 자들과 달리 컴플렉스가 없고 자기객관화에 탁월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속 좁게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조조의 대인배적 면모를 알 수 있는 또다른 대목이 있다. 원소(조조의 적 중 또다른 바보)가 자기 부하 중 가장 글솜씨가 좋은 진림을 시켜 '역적 조조 토벌 격문'을 쓰게 하고 그걸 퍼뜨린다. 그 격문을 읽은 조조는 분통해하지도 위악을 떨지도 않고 "과연 명문이다. 너무 훌륭해서 나라도 마음이 동하겠다"며 아무런 동요 없이 인정한다. 나중에 조조는 진림을 자기 인재로 등용한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왓챠에 올라온 애비규환의 1.5점짜리 리뷰들을 그와 같은 마음으로 읽겠노라고 다짐했다.

(2020. 12. 20.)